강북구가 품은 독립과 자유-3.1운동과 4.19혁명 자료 전시
1916년부터 1920년 3월까지 한국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한 영국 출신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는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의 하라 수상을 만나 "우리는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립(獨立)은 '남의 도움이나 속박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일'이며, 자유(自由)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얂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권리 침해에 맞서 항쟁(抗爭)합니다. 항쟁은 권력자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 싸우는 일입니다. 예컨대 1170년에 발생한 정중부의 난은 무신의 독립과 자유를 침탈(문신이 무신의 뺨을 때리고 수염을 불태운 행태)한 문신들에 대한 항쟁이자 군사정변으로서 '혁명과 반(反)혁명'의 반면교사입니다. 이러한 고려시대 무신들의 권력 지향적 항쟁은 조선시대 외국의 침략과 정부 및 관리의 탐학에 맞선 정의로운 항쟁으로 발전합니다. 항쟁에 앞장선 의병(義兵)은 외적의 침입이나 대규모 반란에 대항하기 위해 사적으로 조직된 군대를 뜻합니다.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병자호란(1636) 때 왕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외적과 싸운 의병과 승병이 대표적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삼정문란과 관리의 탐학 등 민생과 직결한 민중항쟁(1862 임술민란, 1894 동학농민전쟁)으로 발전했고, 1876년 강화조 조약 이후에는 일본의 국권(국가 및 민족의 독립과 자유) 침탈을 막기 위한 항일투쟁(1895 을미의병, 1905 을사의명, 1907 정미의병, 1908 13도 창의군)으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1853년 개항으로 서구식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1905년 우리의 외교권 박탈(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나라를 빼앗으면서 독립항쟁이 본격화됩니다. 순종의 외증손자 김석진이 비분강개해 번동의 창녕위궁재사에서 자결순국했고, 이듬해에는 1894년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천도교(동학 후신) 교주 손병희가 봉황각을 건립해 1919년 3〮1운동 때의 민족대표 33인 중 15인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했습니다. 이러한 의병에 뿌리를 둔 독립운동은 이시영 형제가 창설한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무장한 독립군 및 광복군으로 발전해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36년만에 일제로부터 독립한 우리민족은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 남한 단독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10년 넘게 장기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에서 정권 연장을 획책하기 위해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이를 알게 된 마산시민의 평화적 시위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한 27일 뒤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얼굴에 경찰의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학생을 중심으로 전국민이 이승만의 하야와 재선거를 요구하며 4〮19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승만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지만,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4월 26일 하야했습니다. 이후 항쟁은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등의 민주화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은 2024년 12월 3일 저녁 10시 27분, 제20대 대통령 윤석열이 텔레비전 생중계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다시 등장했으나, 국회의 계엄해제 의결로 이튿날 오전 4시반 물러나고, 대통령 윤석열은 파면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이토록 긴 항쟁의 역사를 지난 3·1운동 기념일과 다가올 4·19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새롭게 이해하는 자리입니다. 특히 강북구에 남겨진 항쟁의 유적을 통해 독립과 자유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재인식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